그새 사월, 일분기가 지났다. 열흘 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마테오는 돌아갔다.그와 이번에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어쩌면 접점이랄 것이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과 파리에서의 추억은 그때의 추억대로 남겨 두겠지만 이제 뭘 더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는 나를 더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함께 만들어 볼 수도 있을 만한 접점마저 없다. 다들 살기 바쁘고, 귀찮고, 타인과 정도 이상으로 가까워질 여유를 두지 않는다. 샘은 유튜브와 틱톡, 마테오는 유튜브와 웹툰으로 나머지 시간을 보낸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가볍게 볼 수 있는 그런 것들. 지윤이 해가 갈수록 감정이 말라 간다는 이야길 곧잘 했는데 회사를 다니면 다 그렇게 되는 건지. 다들 답도 없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가만히 보면 나만 고뇌하고 있다. 나만 아주 좋아하고 아주 슬퍼한다. 그가 떠나던 날 또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 그랬더니 자기가 가는 것 때문에 슬픈 거라면 역까지 데려다 주지 않고 여기서 헤어져도 된다며, 가도 된다고 했다. 이별이 길수록 힘들어지지 않냐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렸다. 그는 슬프게 만드는 것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더 이상 슬프지 않은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운 것은 나 혼자였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 나만 유난이다. 나는 왜 남들처럼 살지 못할까, 생각한다. 그걸 생각하면 외롭다. 외로움은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사는 어느 당신들에게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지만. 남의 마음 신경 쓰기 귀찮고 힘들고 어려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들에게서 연락이 오거나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도 반갑고 기쁜 것에 앞서 버겁다. 혼자 유튜브 보고 영화 보는 게 편해, 나도. 너처럼.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같을 수도 있겠다. 사람에 관해서는 맥이 좀 없다는 접점. 내가 그와 헤어질 때마다 우는 건, 이제 내가 그를 먼저 찾을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보자고 말했지만, 난 잘 모르겠다. 부디 잘 지내.
Requiem for a Dream
오늘은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레퀴엠을 보았다. 이렇게 끔찍한 영화도 오랜만이다. 정말 한 명 한 명 모두가 처참하게 망가지는 영화였다. 사라는 전기 충격으로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되고, 마리온은 마약을 위한 돈을 얻기 위해 성매매를 하기에 이르고, 해리는 감염으로 인해 한쪽 팔을 잃는다. / 이렇게 처참하지만 영상 연출은 무척 훌륭했다. 마약을 하는 장면은 짧은 클립으로 자주 본 적이 있지만 역시 잘 만들었다. 불연속적인 컷들이 아주 짧은 호흡으로 연달아 나오는데, 같은 방식으로 올라간 사운드와의 조응도 아주 좋았다. / 크게 해리의 스토리와 다이어트용 약물을 복용하는 사라의 스토리 두 갈래가 동시에 진행되는데 나에겐 후자가 더 강하게 다가왔다. 더 이상 몸에 맞지 않는 오래된 빨간 드레스 - 젊음 - 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는 망상, 그에 관해서 사라가 오고 가는 환희와 공포의 교차가 정신 착란이 시각적으로 묘사된다. 그 기저에 깔린 것이, 늙었고, 외롭고, 더 이상 돌볼 것도 없는 노인의 마음이라는 것이 슬펐다. 향정신성 약물의 효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 쾌락을 위해 그것을 소비하는, 영화 속 나머지 인물들의 경우와는 달랐으므로.
이달의 월세를 보냈다. 천 파운드씩 빠져나갈 때마다 이곳에서 남은 시간이 줄어들고 있음을 실감한다.
어제 이탈리에서 사온 와인을 결국 다 비우고 동틀 때가 되어서야 잠들었다. 대충 덮어 둔 살라미와 치즈 때문인지 날파리 떼가 방에 모여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경악스러운 마음으로 주방과 복도, 내 방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이 집에서 청소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오랜만에 폴라로이드를 꺼내서 오브제를 촬영했다. 상이 완전하게 맺힐 때까지 한 시간 정도가 걸리는 것 같다. 완벽한 컨디션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얼추 기능을 해내기는 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초점이 바로 나간다는 것이 최대 단점, 충실하게 촬영한다면 접사도 가능하다는 것이 이 카메라의 최대 장점이다. 술을 마시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때 쓸 카메라는 확실히 아니다. 새삼 촬영을 하고 이미지를 기다리는 것이 너무 좋아서 폴라로이드 필름을 컬러와 흑백 두 팩씩 주문하고 내친김에 35mm 필름까지 더미로 구입했다.
사진 아카이브 페이지는 리코로 촬영한 사진으로만 구성했는데 필름 사진도 함께 넣기로 했다. 기존 레이아웃과 너무 톤이 달라서 필름 사진끼리 모으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후지필름으로 찍은 페로의 사진들은 컬러가 너무 세서 난감했다. 롤라이를 갓 구입하고 떠난 여행이어서인지 카메라에 익숙지 못한 것이 사진에서 보인다. sx-70도 그렇지만 역시 카메라는 죄가 없다. 그저 성실하게 찍어야 한다.
아주 오랜만에 집중해서 페인팅을 했다. 페인팅을 제대로 할 때면 모든 걱정이 다 해결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괴롭고 복잡한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 이럴 때마다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하기는 하는 게 맞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다 괜찮아질 수가 있다니.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은 썩은 잎을 떨구고 새 잎을 피우는 화초를 생각하며 시작한 그림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버려야 하는 것들, 작별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다 보면 역시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진다. 오늘은 물에 잉크를 떨어트렸을 때 바닥으로 서서히 퍼져드는 모양과 향을 피웠을 때 퍼져나가는 연기의 모양, 촛불의 흔들림과 중력을 거스르는 분수의 물줄기를 떠올리며 그렸다. 그것들은 처음 내가 생각한 화초와는 관계가 없다.
슬플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다. 마테오가 가고 나서 이게 마지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나와 그의 관계는 이도저도 아니다. 안 맞는데 서로를 원하고 싶어하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이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해롭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는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벌써 만난 지 반 년이 되어 가는데 더 깊어질 것도 더 나빠질 것도 없이 잠깐 보고 즐기고 헤어지는 것이 이어진다. 그는 나와 더 정신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나는 파리를 떠나면서 이미 한 차례 작별을 겪어야 했고 그 작별을 소화해 내느라 시간을 썼는데, 쉽지가 않았는데 다시 그걸 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 버겁다. 그는 늘 친절할 뿐이다. 그 친절이 이제는 고통스럽다.
Sam과 곧 만날 생각을 하면 설렌다. 마테오와 함께 있을 땐 그가 보내오는 메시지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다가 이젠 그것들을 기다리는 내가 참 이중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그래도 솔직하다. 사랑한다는 말은 마테오가 훨씬 쉽게 하지만, 말뿐인 사랑보단 말없는 사랑이 낫다. 그가 날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싫어하는 것들이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마테오와 있을 땐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사랑스러운, 장난스럽고 심각할 것 없는, 그러니까 내가 아닌 사람. 마테오가 해온 연애는 그런 종류였는지도 모르겠고, 그것이 그에게 사랑이라면 난 그를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점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없고 그는 나를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 우리는 점점 더 서로를 외롭게만 만들 것이다.
Sam은 비행기를 탈 수가 없어서 영국에 오는 일정을 취소했다. 기대했던 만남은 수포로 돌아갔다(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타이완에서 홍콩, 홍콩에서 태국, 태국에서 인도, 인도에서 이스탄불로, 이스탄불에서 유럽 어딘가로 이동할 거라며 자기와 함께 가자고 했다.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남자와의 세계 일주라니 꽤 낭만적이기는 하다. 그에게 돈벌이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처럼 들린다. 난 기꺼이 그의 동행이 되어 영국까지 배송해 주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safe delivery service. 나도 디지털 노마드 하고 싶은데 말이다. 뭔가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거기까지 가는 법을 모르겠다. 찾아야 한다.
방법을 모르겠으면 찾아야지. 며칠 전에는 온수가 나오지 않는 보일러 고치는 법을 알아냈다. 알아낸 바로, 보일러는 가스로 물을 덥히고 그 덥혀진 물이 파이프를 타고 집 곳곳에 있는 라디에이터로 흘러 들어가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일정 양의 물이 그 안을 계속 돌아다니고 있는데, 수압이 너무 낮아지면 혈압이 낮은 사람 몸에서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물이 잘 돌지 않는다. 반대로 수압이 너무 높으면 보일러 자체에 부담이 가고 물이 새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for some reason 이 집 보일러는 시간이 좀 지나면 수압이 떨어진다. 그래서 수치가 내려가면 밸브를 열어서 물이 흐르게 해야 한다. 적정 수압인 1.5로 유지해주어야 한다. 처음엔 너무 오래 밸브를 열어 놔서 2.0가 되고 말았다. 그럴 때는 'bleed' the radiator 라디에이터의 문을 열어서 물(피)을 내야 한다.
지우가 며칠 전 런던으로 왔다. 한국에서 지난 10월에 만나고 반 년만에 만나지만 별로 낯설지가 않은 것이 좋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 사귀는 게 쉽지가 않다는 말에 함께 공감했다. 지우는 내가 마지막으로 만든 친구라고 했다. 난 그래도 이곳에 와서 새로 만든 인연들이 꽤 있다. 친구와 아는 사람과 동료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친구이면서 동료일 수가 있을까? 내가 하는 일과 관련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친구로서도 연인으로서도 더 나은 것 같다. '알아두면 일-적으로 도움 될 사람들' 중 하나로 서로를 인맥망에 추가해서 일과 기회를 얻고 서로에게 적당한 인간적 호의를 품지만 그 이상으론 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점점 더 친구 만들기는 사치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래도 난 이 정도면 외롭지 않을 정도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든 편이라고 생각한다. 양보다 질, 폭보다는 깊이. depth over width. I probably made a trade-off. 얕고 넓은 관계망을 내가 지녔더라면 내가 하는 일을 더 확산시키는 게 더 수월하기는 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어쩌겠는가.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세상살이가 좀 더 나았을 것을.
A City of Sadness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다치고 부서진 개인들, 가족들, 혹은 연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사건들과 결코 무관하지가 않으니까. 하지만 석류의 맛에서도 느낀 것처럼, 유니버설한 것과 지엽적인 것, 너무나도 구체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분명하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렸다.
The film could be too historical for someone who was not born and raised in the past decades of Taiwan. The film deals with various cases of the individuals affected by the historical incidents.
Still, there were some parts that was cinematically and narratively strong - 'the quiet lovers' was one of them. Everytime they talk, the screen fills up with white chinese characters on the black background. I see they care for each other even if they don't make a sound. They get married, they give a birth to a boy, and there is a scene of them taking a family photograph. Right after this moment, the scene changes to the voice of the young mother, saying through a letter that her husband has been captured by the police 3 days after taking the photograph. The sudden transition.
I would have to admit the film was a bit too long. But at the same time, when I question again if this has to be this long, I know I would answer, it should to be. This film is a film that cannot be edited in any way. So it might not be the most efficiently made film.
글라스고로 가는 열차 안. 기차는 7시간 20분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망가진 기차가 철로에 있어서 그 길로는 우리 열차를 포함한 아무런 열차도 갈 수가 없었다. 변상을 해준다고 해서 신청했는데 얼마나 돌려줄지는 모르겠다. (덧붙임, 전액을 환불 받았다.) 그 사이 읽던 책 하나를 끝마쳤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기분은 펜을 마지막 남은 잉크 한 방울까지 다 쓰고 버릴 때의 그것과도 흡사하다.
누구와 혹은 혼자서 무엇을 하는지가 어디에 있는지보다 중요하다. 전자가 컨텐츠를 구성한다.
호텔은 아무 장소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벗어난 곳. 여기가 글라스고였던 것도 잠깐 기억이 안 났어. 내일은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한다.
문득 리버풀발 더블린행 티켓을 샀다. 옷가지는 몇 개 없지만 여권도 있겠다, 시간도 있겠다, 못 갈 이유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어쩌면 이렇게 움직이고 싶을 때 움직이는 삶이다. 더 가벼워지고 싶은데, 결국 지금 나에게 돈과 시간이 동시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돈을 벌려면 시간을 써야 하고 시간을 쓰면 돈을 벌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까? 지금 정도의 호텔이 계속 있을 리는 없는 걸 아는데. 그리고 언젠가는 돈이 떨어진다는 걸 아는데. 그와 나는 비슷한 걸 원하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다만 나머지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아직 그 점을 증명하지 못했다. 거지처럼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남들이 원하는 것, 좋은 집과 좋은 차, 좋은 음식과 옷, 안정적인 직장보다 나에게 중요한 건 이런 자유와 변화일 따름이기에. 창조적인 에너지는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을 때 샘솟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계속해서 변화 속에 있을 때야말로 살아있음에 가깝고, 내가 살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인생을 내다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내가 집도 돈도 없이 언제까지 불안하지 않을지는 자신할 수가 없다.
On Chesil Beach, Ian McEwan
암스테르담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Ian Mcewan의 소설, On Chesil Beach. 한국에서도 개봉했던 영화인지라 제목부터 익숙했지만, 영화화한 것을 보기 전에 책부터 읽고 싶었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케이스들 - 책을 읽기보다 영화를 더 자주 보기 시작한 이래로는 영화를 먼저 접하고 그 다음에 책을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영화를 먼저 보면 왠지 김이 새서 책을 꼭 읽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가 않아서 소설과 영화를 비교할 기회가 최근에는 많이 없었다.
클래식 음악을 소설의 요소로 끌어들이는 경향도 비슷하지만 - 플로렌스의 직업은 바이올리니스트고, 암스테르담의 클라이브는 심포니 작곡가로 등장한다. - 인물의 내면 심리와 의식의 흐름을 분석적으로 묘사하는 서술 방식과 다층적인 multilayered 시간적 배경 때문에 쿤데라가 연상되기도 한다. self absorbed artist로서 플로렌스와 클라이브의 캐릭터는 공유하는 구석이 있다. 이 소설에서 에드워드는 플로렌스의 고차원적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파혼에 이른다(합일에 이르지 못한다). 두 사람은 양립 불가능한 두 종족처럼 묘사된다. (1) 에드워드는 날것에 가까운 락음악을 듣고, 새와 꽃에 대한 지식이 있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과 그 사건을 증명하는 문헌 내지 물증들에 대한 신뢰에 근거하는) 역사학을 전공했고, 육체적 쾌락을 비롯한 ‘보다 직접적인 것‘, 만져지는 것 tangible 에 몰두한다면, (2) 플로렌스는 질량이 없는 소리를 다루고, 그가 하는 것은 음악 중에서도 클래식이며, is more refined and sophisticated, 그가 에드워드를 향해 품는 마음은 지극히 정신적인 어떤 것이다.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은 플로렌스와 에드워드 둘이 전부이고, 시간적 배경도 결혼식을 올린 날 낮부터 밤까지 반나절 정도로 길지 않다. 전지적 작가-신의 시점에서 제공하는 과거의 사건들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일련의 정보들이 그 사이사이를 메운다. 이것은 소설 속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말 그대로 전지적인) 서술자의 (출처가 불분명한 머릿속) 목소리다. 영상으로 따지자면 나레이션이 덧입혀진 형태가 그려지기도 한다.
에드워드가 머릿속으로 플로렌스와의 어떤 에피소드를 회상할 때는 장면이 과거로 전환되고, 회상이 멈추면 다시 현재의 시공간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제목에 걸맞도록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체실 비치에서 오가는 둘의 대화이다. 대화가 따옴표에 들어간 방식으로 직접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인데, 대사의 호흡도 길고 두 사람의 행동 묘사도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소설적인 형식의 글에서 갑자기 연극 무대의 한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The announcement was repeated without any notable updates. Vague hopes were given but in a kind and honest way. The voice made us smile at times. It somehow felt as if something terribly bad has happened. It was surreal even, that the train (something which I experienced as is always moving) was not moving, and we were simply sitting still there on our seats for almost 100 minutes.
No plans in Glasgow. I like the hotel, even more when I think of the breakfast which awaits for me each morning. I find myself not being as much interested in nature as before. I don't romanticise nature anymore. The wide spatial scale of natural environment(sea and mountain equally) is always pleasing and releasing from packed condition of cities. Nonetheless, more and more I find out the nature is not where I belong. Being around people and staying close to what people think and make and suggest is what I find interesting.
I think about my politeness when I take pictures. 'Loving in distance', like Flo. Taking a photograph is obviously an act of showing one's desire. (Like sex, taking a photograph is always related to power dynamics between two or more people.) Some photographers, how can they be so interested in other people's lives? And some othet photographers, how can they be willing to expose their own private moments of life? What is that for? How can they be so sure that they are not consuming, instrumentalising the subject? How can they be so proud?
오늘도 멀리 가지 않았다. 모던 인스티튜트, 굿프레스와 글라스고 그린, 트론 시어터. 원래 가려고 했던 곳들. 사진 전시도 좋았고, 굿프레스에서도 한참을 보냈다. 극장에서도 그랬고, 정말이지 런던은 도시적인 곳이기는 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뒤집어 본다면 글라스고는 조금 더 시골적이다. 더 작고, 더 정겹고, 촌스럽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마을의 분위기가 여기선 난다. 만만해서 편안한가. 얼마 후 결혼을 하는데 초대장을 어느 선까지 돌려야 할지 고민이라는 책방 손님과 오너의 친근한 대화, 그리고 그에게 하는 오너의 말, 'good luck with struggling'. 길에 사람도 차도 훨씬 적은 것이 런던과 비교하면 무척 낯설다. 여기서 글라스고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으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런던으로 간 것이 역시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이렇게 폭풍처럼 몰려오고 떠난 사람들, 경험들. 큰 도시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는 것 같다. 난 살아본 끝에 런던이 나머지의 유럽과는 다른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영국의 나머지 도시들과도 전혀 다른 것 같다. 런던은 영원히 내 이십대의 큰 지분을 차지하는 공간으로 남겠지만, 왠지 다른 곳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3년이면 오래 살았다.
호텔에서 뛰어가면 3분만에 도착하는 극장에서 연극을 봤다. 스크래치라고 부르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연극을 시험 삼아 무대에 올리는 이벤트. 15분 가량의 짧은 분량으로 네 편의 작품이 이어졌다. 단편 영화를 모아 상영하는 행사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들어가면서 작품에 대한 가벼운 질문이 포함된 질문지와 펜을 받았다. 언제부턴가 관객의 참여를 필요로 하는 작품들에 대해 최대한 임하려고 하는 편인데, 생각보다 마땅히 대답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 질문이 많아서 결국엔 종이를 내지 않았다. 진행 중인 작업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던 크리틱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난 그때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축에 속했다. 영화나 책, 전시를 보고서도 곧잘 떠오르는 생각들이 생기고 그것들을 말로 정리하는 일에도 익숙한데 왜 이럴 땐 조용해지곤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오늘 무대에 오른 극들은 컨셉추얼하거나 무거운 것들보다는 연극을 만든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가벼운 스토리텔링이 주를 이루었다. (1) 가장 고전적인 축에 속했던 첫 번째 극. 죽음을 앞둔 사람의 내적 갈등에 대해 말하지만 그 내용의 중심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대신 갈매기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서 조금 더 유머러스하게 전달한 방식이 주제의 무거움을 조금 더 가벼운 쪽으로 움직여서 밸런스를 이룬다. 갈매기를 연기한 배우는 꽤 재치 넘쳤다. 갈매기 분장 하나 없이 극에서 필요한 역할을 딱 적당한 수준으로 해낸 느낌. (2) 두 번째 극은 알파벳 수프라는 익숙한 아이템을 제목에 가져와서 꽤 색다르게 시작하는데, 정작 말하고 싶었다는 paternal memories 의 중심으로 연결짓는 것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화재로 피어오르는 연기, 수프 먹는 소리 따위를 오브젝트를 활용해 수작업으로 연출한 점은 좋았다. (3) 가장 반응이 좋았던 세 번째 작품 버니는 못 나가는 예술가의 사랑스러운 분노를 과장되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웃음을 끌어낸다. 갑자기 인어공주 사운드트랙인 part of your world 의 가사를 장난스럽게 바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등, 왜 저래, 싶으면서도 그 마음이 짠하고 또 한편으론 공감이 가서 예쁘게 보게 된다. 이건 '나 좀 봐주세요. 나 좀 봐달라, 이런 얘기예요.' 이런 대사로 막이 내리는데 이 극 자체가 모든 '관종'짓의 총체라는 점에서 그 말이 그냥 하는 것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15분 동안 그의 절박함과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비굴해지지는 않는 버니를 매력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4) 중국계 영국인 연출자가 만든 마지막 작품. 정체성 혼란과 인종과 성차별 등 사회적 문제를 끌어온 방식이 약간은 고루했고 위기 극복의 성장 서사로 완성되는 엔딩도 새롭지 않았다.
굿프레스에선 소규모로 제작된 독특한 인쇄물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내용에 앞서서 인쇄된 방식과 제본 형태 등이 주는 미적인 쾌감 때문에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책들이다. 이런 접근도 가능하구나. 지극히 소소한 컨텐츠를 가지고도 멋진 작업물을 만들어낼 수가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일 년 전처럼 좋은 자극을 받고 나왔다. 홀린 듯이 두 부나 구입한, 값싼 잉크와 종이로 뽑아낸 OUTLINE 사의 비정기 간행물은 순전히 위키피디아 컨텐츠로만 구성되어 있다. compiled by -. 주제에 따라 선별한 위키피디아의 개념들을 모아 놓은 '컴필레이션'.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지식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인, 서점에서 파는 사전과는 달리 미신myths 내지 음모론conspiracy 처럼 느껴지는 기묘한 개념들이 많이 실려 있다. 마치 유일무이한 진리처럼 서 있는, 공인된 지식이 모여 있는 산 a group of facts that are proven to be truths 이 저편에 있다면, 여기엔 믿으면 진실이 되고 믿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그러므로 변덕스러운, insecure, 불안정한, 취약한, 민간의, 지식 모음집이 있다.
글라스고 일정을 마무리하고 리버풀로 가는 중이다. 이틀 사이 호텔에서 보내는 시간을 무척 즐겼다. 여행 중에도 혼자 있을 공간과 침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된다. 인풋을 위해 움직인 것이라곤 하더라도 그 중간 중간의 쉼이 필요하다. (여행 갔다고 무리하다가 고장난다. 여행이 아니라 고행.)
생활하는 공간에서 벗어나서 다른 도시, 다른 집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다는 것이 주는 상쾌하고 가벼운 감각이 있다. 특히 호텔의 유니버설한 구조는 어딜 가도 똑같아서 불결하지만 않다면 안정감을 준다. 침대가 중앙에 있고, 주방 없이 나머지 공간엔 작은 책상과 운이 좋으면 소파와 테이블까지 있는 형태. 문득 창 밖을 보니 양들이 풀밭에 팝콘처럼 흩어져 있다. 더 작은 사이즈의 새끼 양들도 더러 보인다.
Patricia Fleming
글라스고에서 이틀 동안 방문한 갤러리 두 곳 모두 만족스러웠다. 아티스트 스튜디오와 같이 있는, 파트리샤 플레밍이라는 이름의 갤러리.
Elisabeth Molin 의 브론즈 조각들에선 무거움과 가벼움의 좋은 밸런스가 느껴졌다. The heaviness of (1) the bronze as the physical matter and (2) the titles of the work - names of the ancient greek gods. The lightness of the original materials - everyday objects, mostly industrial. composite 흙. composition. They were 3-dimensionally made collages.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대체로 이 밸런스를 이루는 것들인 것도 같다. 트라지코미디, 비희극. 사진에선 콘트라스트가 상을 만든다 (콘트라스트가 0인 사진에는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본능적으로, 한쪽으로 기운 것을 싫어하는지도 모르겠다.
Kate V Robertson 의 사진과 설치 작업은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다. 성공한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재밌어야 한다. 예쁘고 잘생기면 보는 것이 재밌는 것처럼. 아는 게 많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새로워서 재밌는 것처럼. 유머가 뛰어난 사람이 적재적소에 딱 적당한 무게감으로 코멘팅을 하면 재밌는 것처럼.) 딱히 이미지가 전달하는 내용이 이런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음에도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 충분히 감각적이었다. 설치물들에선 프레임과 이미지를 분리하거나 프레임의 범위를 확장시킨 시도들이 좋았다.
십자말풀이를 하는 사람들(대체로 아주 몰입한 것처럼 보인다.)을 볼 때 슬며시 웃음 짓곤 한다. 왠지 모르게 보기 좋아서 흐뭇하게.
올해 들어서는 볼펜을 거의 매일 쓰고 있다. 볼펜은 번질 염려가 없고 필압에 따라 선의 텍스처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점이 재미를 준다. 볼펜으로 글씨를 쓰면 그 움직임의 맺힘과 뻗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금까지 나는 볼펜을 쓸 줄을 몰랐던 것 같다. 특히 한 획으로 라틴 알파벳 문장을 이어 적으면, 펜촉이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바닥으로 꽂힐 때와 둥글게 말릴 때의 차이를 즐길 수가 있다. 이십내 초반 내내 하이테크 0.3만 고집했던 것을 떠올리면 스스로도 신기한 변화이다. 만년필이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잉크펜은 일정한 선굵기를 유지한다. 내 글씨를 보는 사람들마다 그 균일함에 놀라며 폰트 같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는데 그건 그 글씨를 쓴 도구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글씨와 지금의 글씨는 달라지기도 했다. 우선 글씨의 각도가 오른쪽으로 기울었고, 가까운 획을 이어서 쓰는 버릇이 생겼다. ‘로‘를 예로 들면 다섯 번의 획으로 나누어서 쓰던 이전과 달리 ㄹ의 시작부처 ㅗ의 가로획까지 거의 펜촉을 들지 않고 한 획으로 쓰는 것이다. 서예로 따지자면 예서에서 해서로 쓰기 방식 자체가 변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건 내 두꺼운 몰스킨이 아니라 포켓노트를 더 자주 쓰기 시작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데, 대부분 이동하는 중에 휘날리듯이 글을 쓰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글자를 쓰는 속도를 같이 끌어올리게 된 것이다. 수도원의 필경사처럼 글을 쓰던 태도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문장의 정교함은 반대로 떨어졌다.
리버풀에서 하루를 보내고 받는 인상은, 시원시원함, 탁 트임, 투박함, 대범함. 런던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이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바로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더 큰 의미의 '영국적인' 것은 런던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발견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다를 끼고 있는 이 도시는 사방이 널찍하게 트여 있는데, 이건 항구 도시가 공유하는 특징인 것 같기도 하다. 비틀즈에서 링고를 제외한 세 멤버가 모두 아이리시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곧 갈 더블린과 지도에서 보는 위도가 거의 같다.
One to One: John & Yoko
다큐멘터리인지 무대영상인지 뭔지도 모르고 호스텔 체크인인 세 시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게다가 나는 비틀즈의 성지에 와 있으니) 예매한 영화였는데, 눈물이 살짝 고일 정도로 감명을 받고 나왔다. 이 척박하고 험한 세상에서 개인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스토리.
전체 영화가 꾸려진 형태와 시청각적 리듬이 아주 훌륭했다. 두 사람이 뉴욕의 빌리지에서 지냈던 실제 방을 연상시키는 공간. 침대가 중앙에 놓인 텅 빈 방. 유일한 움직임은 켜져 있는 TV 속의 영상. 카메라가 그 방을 유영하듯 느리게 보여주다가 켜져 있는 TV 속의 화면으로 자연스럽게 줌인하면서 본격적인 자료화면들이 등장한다. 연이어 등장하는 클립들 사이로 텔레비전이 돌아가고 있는 존과 요코의 방이 종종 다시 등장하는데, 이것은 파편적으로 모여 있는 영상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한다. 클립 사이 사이에 삽입된 광고 영상들은 서로 다른 영상들을 자연스럽게 연결 짓는 동시에, 반복되는 풋티지들로 호흡이 느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유튜브 숏폼에 가까운 단위로) 영화를 잘게 쪼개는 역할도 한다.
평화주의자, 액티비스트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저들은 대체 무슨 수로 저런 행동들을 한 걸까, 그 에너지의 원천이 경이로웠다. 자신이 실천하는 작은 행동으로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은 어디서 난 건지,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지. 오노 요코는 정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여자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고, (말만 존재하고 실례가 보기 드물다 보니 거의 쓰이는 바가 없어서 촌스러운 말이 되어버리고 만) ‘소울메이트’라고 불러도 충분해 보이는 둘의 관계 부럽기도 했다. 콜라보레이션의 모범 사례. 두 사람이 만나서 더 큰 것을 해낼 수 있게 되는 드문 경우. 둘이 어쩌면 증명해낸 것이다.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거야. 자기가 가진 재능과 명예를 무엇을 위해 쓰는 것이 선을 향해 나아가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What I found at least from the video clips is that John and Yoko both had a very assertive attitude towards things - they seemed to be very certain of things they were doing. They were people who actually understood what their actions could possibly bring into the world.
The camera floats around the room (a very ghostly movement) and then seamlessly zooms into the screen of the TV. Except for the room set created, the film is solely made of the video footages from the 1970s that features John and Yoko - interviews, TV shows, stage performances, voice calls, etc. Rather than simply putting the collected fragments together, the director takes a clever approach of inserting TV commercials between one clip and another. This has two main effects - (1) the refreshment between the repeating video footages and (2) the provision of a quick look of the visual culture of 1970s of the US brought by the spread of the television use. Each commercial disconnects and connects the two different clips at the same time.
They did what they 'can', instead of thinking about what they 'cannot' do.
너의 모든 농담을 이해하게 되는 때, 나는 너를 한참 전부터 사랑하고 있었을 거야. 그날이 오기를 기다려.
Walker Art Gallery
존 무어 페인팅 프라이즈를 설립한 사람이 리버풀 출신의 비즈니스맨이고 수상작 전시를 이곳 워커 아트 갤러리에서 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걸 와서야 알았다. 데이비드 호크니와 피터 도이그가 수상자 리스트에 속해 있다. 컬렉션의 규모는 꽤 컸고 대부분이 페인팅이어서 더 즐겁게 관람했다. 이미지로만 봤을 때 딱히 매료되지는 않았던 작가의 페인팅은 실제로 보니 꽤 매력적이었다.
Graham Crowley. 스케일은 큰 편. 카드뮴 옐로우 위에 페인즈 그레이로 팔레트가 제한되어 있다 (1과 0으로 구성된 이진법에 견줄 만하다). 페인트가 처리된 방식이 에칭 작업을 할 때 그라운드로 판 위에 올라가는 이미지의 텍스처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화이트 대신 옐로우가 쓰인 것이 다를 뿐 프린팅에서의 (특히 1도 프린트) 이미지 제작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페인트의 농도는 잉크처럼 묽다. low viscosity of the paint. 점도가 낮은 페인트를 쓰면 붓의 흔적과 스트로크의 방향 따위가 투명하게 드러난다. 페인터는 붓의 움직임을 연출하는 사이 바닥의 옐로우 컬러가 어느 정도로 노출시킬지를 더불어 '선택'하는 것이다. 바닥에 깔려 있는 옐로우는 이미지에 계속해서 참여한다. 반대로 점도가 높아지면 페인트는 마치 클레이처럼 캔버스 표면 위에 얹혀 있게 된다. 이때 캔버스는 바닥의 역할만 할 뿐 이미지에 참여하지 않는다.
인상주의 페인팅들은 일종의 사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페인팅이 전달하려는 ‘내러티브’ (이것과 저것의 의미, 심볼, 장면 구성, 스토리텔링. 영화의 미장센과 마찬가지. 영화가 없던 시절엔 페인팅이 곧 영화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듯이 페인팅을 보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꼈을 것이다.)보다 페인팅 방식과 이미지 문법 자체에, 작가가 바라본 방식과 물감을 매체로 해서 그 그림이 ‘그려진 방식’이 곧 내용이 되기 시작한 시초.
아무런 기대 없이 도착한 더블린에서의 둘째날. 리버풀 공항 이름이 존 레논이라는 이유만으로 괜히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여긴 볼거리가 많은 곳은 확실히 아니다. 페로 제도나 아이슬란드처럼 경이로운 자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흥미로운 도시 경관을 지닌 것도 아니다. 도시에 가면 늘 물가부터 가 보는 편인데, 이곳을 가로지르는 Liffey 강의 폭과 도로의 구조는 파리와 무척 비슷한 인상을 준다. 리버풀이 비틀즈의 성지라면 아일랜드는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 프란시스 베이컨 등이 태어난 땅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비틀즈와 리버풀에 대해 말하면서, 비틀즈는 리버풀에서 시작했을 뿐이지 그들을 지금의 비틀즈로 완성시킨 곳은 매튜 스트리트가 아니라 런던, 그리고 더 크게는 뉴욕이라고 했다. 베이컨도 결국 런던으로 넘어가지 않았던가. 베케트는 대부분의 삶을 파리에서 보냈고 프랑스 땅에 묻혔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조차 그는 더블린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preferred Paris at war to Dublin in peace'. (그러고 보면 멋진 작가들은 다 자기 나라를 떠났다.)
내가 앞으로 필요로 하는 건 어느 정도 아카이빙이 가능한 공간이다. 그 사이 아카이빙 실력도 정리하는 요령도 늘었다. 여기 있는 짐을 빨리 가져가서 하나로 모으고 싶다. 버리지 못했던 것들이 정말 많았는데, 근 몇 년 사이 버리는 일에 대한 부담이 많이 사라졌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주 많은 것을 버릴 것이다. 버릴 것, 보관할 것, 지금 가까이 둘 것을 구분해서.
나는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될 것이다. 일종의 스터디로서의 여행. 언젠가 내 일 년은 여행하는 상태가 여행하지 않는 상태와 거의 같은 비율이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페인팅을 계속 할 수 있는 것. 이제 어디로 떠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도시는 배경일 뿐이고 내가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것을 보는지가 더 중요하다. What really matters is ME. 내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시간이라서 나는 돌아간다.
이번에도 오며가며 서로 다른 방식의 좋은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제 다녀온 휴 레인 갤러리의 베이컨 스튜디오에서도 꽤 좋은 에너지를 받았다. 베이컨의 사우스 켄징턴 스튜디오를 재현해 놓은 공간과 함께 그의 작업 과정과 관련된 거의 모든 요소들에 대한 오디오 설명이 제공되었다. 그가 어떤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어떤 재료를 썼는지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 Source material 의 중요성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늘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깊이 생각할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연출이라는 걸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가. 아일랜드에 대한 인상, 작고 좁다는 생각이 가장 강하게 든다. 시골 사람들처럼 허물 없는 것이 이렇게나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영국인과 정반대인 것이 놀랍다. 세련된 것 refined 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다. 아이리시 악센트는 아주 낯설게 들린다. 도날은 아일랜드의 시적인 정서가 언어에서 온다고 했다. (그건 진짜일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뭘 할 수가 없었던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서 빛을 발한 경우가 대다수라는 점도 사실이다.
모로코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니하오와 아리가또를 하루에 수십 번씩 들어야 했던 점을 빼고선 나쁘지 않은 여행이었다. 과속으로 닷새 동안 세 번이나 벌금을 물었다. 처음에는 헛웃음이 났지만 나중에 가서는 울었다. 가뜩이나 경비도 시간도 빠듯한데 300 디르함을 내야 하는 것이, 그것도 구글 맵에는 뜨지도 않는 속도 규정을 맞춘다고 맞췄는데도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다는 것이 분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드라이빙은 대체로 즐거웠다. 앞뒤로도 양 옆으로도 뻥 뚫린 황량한 도로를 끝없이 달리는 쾌감이 상당했다. 명민과 둘이서 여행을 하는 사이, 나에 대해 새롭게 인지한 바가 있었다. 나는 그에 비해 사람을 포함한 외부 자극에 대해 훨씬 더 방어적이다.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여전히 나는 누군가의 호의나 인사 따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최소한의 말만 하고 불편한 게 있어도 도움을 청하기보다 참거나 혼자 해결하는 오래된 습관. 혼자였다면 평소 습관대로 그냥 넘어갔을 것들을 명민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열흘 동안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들을 충분히 했다. 최근 다녀온 것 중 가장 본격적인 여행이었고 아프리카 대륙을 처음 밟아본 것이기도 했다. 음식은 아주 맛있었지만 덥고 건조한 기후 탓에 어딘가 몸이 항상 편안하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명민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그립기도 했다. 그래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비행이 오히려 떠나던 때보다도 더 기대가 되었다. 멀리 가는 것은 결국 두고 온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위함인가. 한때 낯설기도 했을 런던이 이제 그 어느 곳보다도 익숙해진 것은 신기한 일이다.
처음으로 비트를 사보았다. 요리에 섞여 나오는 붉은 빛의 뿌리만 먹어 보았는데 줄기 부분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고 버터에 볶았는데 식감도 향도 좋다. 아침에는 고구마를 삶다가 냄비를 태워 먹었다. 사진을 정리하다가 불에 올려 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바람에 화재 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리는 상황을 만들고야 말았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퀴민과 코리앤더, 꿀과 플랫 파슬리를 다져 넣었더니 모로코에서 먹은 그것과 비슷한 맛이 났다. 그린빈과 텐더스톰 브로콜리는 가볍게 데쳐서 올리브 오일, 소금 후추만 뿌렸다. 채소만 먹어도 이렇게나 충분한 식사가 마련된다. 앞으로 종종 요리해 보지 않은 재료들을 자주 사 보려고 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늘 거치는 작업들을 오늘 마무리했다. 리코로 찍은 마지막 사진들을 어제 밤을 새워 편집했고 갈무리 노트도 한 페이지 채워 넣었다. 나의 사진 아카이브 페이지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모로코는 사진발을 잘 받는 것 같다던 명민의 말대로 훌륭한 이미지들을 많이 얻었다. 모로코 특유의 따듯한 핑크빛이 고루 섞여 있는 사진들. 빛에서 오는 강한 콘트라스트와 곳곳에 있는 화려한 색들이 이루는 조화가 훌륭하다. 이번에는 평소 관심을 갖는 공간과 색채을 넘어서 조금 더 구체적인 생활상을 담는 것을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고르게 되는 사진들은 시각적으로 어필하는 것들이다. 나는 이 페이지를 각 여행지에서 추출한 팔레트들의 집합으로 여긴다. 이렇게 매 여행 이후 시간을 들여서 아카이브를 쌓아 가는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한 작업이다. 언어로 기록을 남기는 것 또한 내 삶의 데이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이 데이터는 어떻게 쓰일지 지금은 명확히 말할 수 없을지언정 언젠가 미래의 나에게 중요한 자료로서 존재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나머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난 뒤에 (어쩌면 오직 나 한 사람에게만 유효할 수도 있겠지만) 비로소 기능하기 시작할, 미래를 바라보는 작업이다.
그림을 가볍게 그리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지 조금 되었다.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붓을 잡지는 않았다. 구체적인 타이틀 없이, 일종의 일련번호 체계를 만들어서 올해의 그림들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얼마 전 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빌려 일차로 카피된 현실을 다시 손으로 카피하는 작업이다. 카메라가 본 현장을 떠올리는 대신, 그 결과물인 사진에 충실하게 프린트의 크기와 비율 그대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그리는 행위를 생경하게 만든다.
나는 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별로 없다. 명민과 작업하는 삶에 관해 말하던 중 일종의 엇갈림이 있었다. 나는 작가는 최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의 필요를 위해 무언가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반면 그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과 자기 자신을 위해 창작하는 것을 사실상 함께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추진력과 적극성,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없는 스스로에 대해 씁쓸함을 느낀다는 듯한 이야길 했다. 나는 내가 만드는 것들이 여전히 어떻게 소비될지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직업으로 이 일을 할 생각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고, 그런 사명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작가라고 불리는 것과 스스로 작가인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며 나에게 이 일로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점점 더 사라지는 중이기 때문에 그 말에 바로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자기만족을 위한 창작은 취미에 그친다, 그건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다, 라고 누군가 내게 말하고 명민이 말한 것 또한 '프로' 예술가에 관한 문제였다면 우리는 다른 범주에서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어버이날을 죄스럽게 넘겼다. 가족과 돈독한 사람들이 지닌 안정감이 늘 부럽다.
글자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세상과 아무것도 주고받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마음이다.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나를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테니 이 세상도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를.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할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대신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게. 단 한 번도 사회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 없다. 그 속에서 즐거웠던 적 없다. 매번 웃어넘겨야 했다. 개인은 아름다울지언정 그 수가 불어나면 꼭 점들의 모임처럼 징그러워진다. 지긋지긋한 관계들. 홀몸인 상태로 영국에서 와서 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언가를 쌓아 나가면서, 모순적이게도, 나는 잃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하는 삶을 살아본 적 없다. 나는 사람 속에 섞여 사는 일에 단련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외롭지 않냐고 물을 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애초에 누군가와 섞여 지낸 적이 없다. 외로움을 느끼려면 집단에 속한 느낌을 한 번쯤은 경험했어야 한다.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그리고 외로움은 그 부재에서 오는 감각이다.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지독하게 혼자인 감각이라는 걸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상태에 적응했다. 사람 없는 상태에 불가피하게 적응해야만 했고,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진 것 같다. 내가 일찌감치 잃어버린 사람들. 엄마, 아빠, 언니, 친구들. 남은 게 나밖에 없다. 그저 최대한 친절하게 살고자 한다.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마음.
어디에서 살아도 이제 괜찮을 것 같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그리고, 읽고 싶은 것을 쓴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그의 의견을 알고 싶은 마음이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남들에게 작가로 불릴 자격이 없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긴 적은 없지만 단지 일반과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이 세상 어딘가에 또 그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대로 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곁에 주어진 것만으로 다행이다. 우리는 하나도 같지 않다. 한 명 한 명이 다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 나를 이해한다고, 너를 이해한다고 착각하지 말자. 숨기고 살아도 결국 드러나곤 하잖아. 그 간극을 최대한 오래, 편안한 마음으로 덮어둘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뿐이다.
우울하고 외롭다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보낸 엽서는 아마도 몇 주째 하늘에서 떠돌고 있는지 감감무소식이다. 그와 보낸 시간이 그리워서 대만행 항공편을 찾아 보았지만 그 시간과 비용을 들여 2주 남짓 보고 돌아오는 것이 어쩐지 아둔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게다가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그때의 추억인지 그인지도 아직 명확하지 못하다.
HTML과 CSS에 이어 자바스크립트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비주얼적인 것보다 기능적인 부분이 더 커서 생각보다 지루하게 느껴진다. 웹사이트는 두 가지의 언어만으로도 충분히 지어냈지만 해결하지 못한 부분은 액티브 링크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기능.
맡긴 필름 세 롤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된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고 망가진 리코를 직접 수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보기 좋게 수포로 돌아갔다. 헐값에 구입한 십자 드라이버로 오후 내내 작업했지만 상태를 더 악화시킨 꼴이 되었고,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는 나사들과 함께 포장해서 구석에 넣어 두는 것으로 한바탕의 작업을 마무리해야 했다.
어제 사온 체스트넛 머쉬룸과 토마토를 볶고, 계란후라이와 버터를 바른 토스트, 베이크드 빈으로 고기는 없지만 근사한 브렉퍼스트를 만들어 먹었다. 치즈케이크가 담겨 있던 자그마한 유리 컨테이너를 요긴하게 쓰고 있다. 오늘도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보냈다. 샘과 매일 나누는 짤막한 메시지들과 맥주를 사러 나가서 점원과 나누는 사무적인 대화가 타인과 나누는 교류의 전부이다. 샘은 정말 자주, 지루하고 외롭고 불행하다는 이야길 내게 한다. 그런 얘길 들으면 딱히 해줄 말도 없다. 내가 그의 곁에 있었더라도,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도 부주의하게 오일 통을 엎었다. 며칠 전에는 와인잔을 엎어서 깨고 급하게 이불 빨래까지 했는데, 그 다음엔 자주 쓰던 유리 그릇을 깨더니 또 비슷한 실수를 했다. 멍하게 살고 있나 보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머리를 가볍게 자르고, 그 다음 주 일요일부터는 8주 동안 도자 수업을 듣게 된다. 2018년이면 벌써 7년 전이다. 여름날의 서촌과 흙을 만지는 감각은 하나의 이미지로 내 안에 자리잡고 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 원초적인 행위. 나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다 주는, 발견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제 받아 본 필름 사진들을 다시 제대로 정리하고 페이지 그리드를 업데이트했다. 업로드 전 레이아웃을 잡는 데 피그마를 활용하니 공간의 제약이 없어서 아주 요긴하다. 이번에 처음 써본 칸디도 200는 생각보다 컬러 왜곡이 심해서 파일을 받아보고 약간 당황했으나 천천히 다시 보니 모로코의 강한 색감과 썩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도 든다. 사이안의 블루와 레드가 아주 강하고 전반적으로 빈티지 엽서 사진에서 나올 법한 진득한 색이 나온다. 필름으로 찍은 사진들을 아카이브 페이지에 포함시키기 시작한 후로 이렇게 서로 다른 톤들을 어떻게 맞춰야 할지 결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사실 리코도 여느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톤을 내는 편이고 그 톤은 맑고 정제된 색감이다. 기본적으로 웜톤이 베이스인 탓에 정확한 컬러를 담아야 하는 작품 사진을 찍을 때는 그다지 유용하지 못한 기계였고 그럴 땐 매번 온도를 낮추어야 했다. 한 번 떨어트린 이후로는 센서에 자꾸 먼지가 끼는 문제가 있기도 했다. 어쨌든 스캔본들을 받아보기 전에 먼저 리코로 찍은 사진들로 레이아웃을 한차례 구성했었는데, 역시 필름 사진을 더하니 상대적으로 너무 납작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겹치는 이미지들을 빼고 배열을 다시 하는 과정 중에 선택했던 이미지들의 절반은 버리게 되었다. 필름이 들은 것을 깜빡하고 카메라를 중간에 한 번 열어버린 탓에 브리스톨에서 찍은 사진들이 빨갛게 그을렸다. 원래 색이 강한 필름인데 그을린 얼룩이 너무 강해서 이미지 자체가 너무 진해졌다. 리코로 담은 남부 바닷가의 흐린 하늘빛이 대부분인 잉글랜드 페이지에서 브리스톨만 다른 톤이 나온 것은 다소 낭패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필름으로 찍은 모로코의 컬러와 거의 비슷한 톤이 나왔는데, 그렇다면 각 지역의 컬러 팔레트를 만든다는 이 페이지의 본 취지를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모로코의 색과 브리스톨의 색이 비슷하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같은 이유로 벤 네비스에서 골드로 찍은 사진들을 결국 포함시키지 않기로 했었다. 이번에도 느꼈지만 이제 정말로 골드를 그만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늘 습관적으로 ISO 400의 코닥 울트라맥스를 구입해왔는데, 그 옐로우톤은 빛을 촬영하기엔 최적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나머지 경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테오를 생각하면 이제 마음이 갑갑하다. 이건 뭐 버리지도 못하고, 아무 미래도 없는 관계를 뭘 어떻게 지속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친구로 지내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 마음 같아선 그냥 이 애매한 것을 싹 정리하고 끝내 버리고 싶지만 또 그러자니 그도 나도 서로에게 딱히 잘못한 것은 없어서 그런 선언을 하기에도 무색하다. 그냥 내버려 두자.
또 어디서 날 봤는지 스튜디오 비짓을 하고 싶다며 새로 판 이메일 주소로 메일이 한 통 왔다. 난 스튜디오도 없고 그림도 잘 안 그리는데, 뭘 보여줘야 합니까. 그렇지만 사진을 보다가 그림에 대한 생각을 또 다시 했는데,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평화롭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 요소가 내가 촬영하는 사진들에도 그대로 있다는 점을 인지했다. 사실 내 사진들은 유형학적 사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거의 비슷하다. 거의 공통의 문법에 따라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야외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넓은 공간을 그리드 체계의 시각 문법을 준수하여 담아낸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진들을 줄세우면 그 선이 마치 하나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정도로, 땅과 하늘이 사진 안에서 구분되는 지점이 거의 모든 사진에서 동일하다. 기울기는 무조건 수평으로 맞춘다. 사진을 참고해서 그린 것이 아니더라도 내 페인팅에서 또한 이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니까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내가 만드는 플레인은 막힌 공간인 동시에 그 안에서 순환하는 공간이다. 완벽한 리듬을 지닌 폐곡선을 만드는 것이다. 마치 이음새 없는 매듭처럼 끝없는 루프. 나는 이미지에서 완벽을 추구한다. 메이플소프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은 완벽하지 못하니까. 나는 내가 들어가 살 완벽한 집을 짓고 싶은 것이다. 이 세계는 너무 시끄럽고 늘 변화에 취약하고 그러므로 신뢰할 수 없다. 그러니까 ‘대안‘의 집 alternative home, 상징적인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이다. 나는 늘 도망치고 싶었다.
새로 사 본 프랑스산 Doux de montagne 치즈는 맛이 조금 실망스럽다. 나머지들 가운데 말랑한 것이 신기해서 구입해 보았는데 베이비벨 치즈랑 비슷한 식감과 향으로 무척 가벼운 맛이다. 늘 사워도우만 먹다가 브렉퍼스트에는 네모 식빵이 맞겠다 싶어서 오랜만에 Warburtons의 저렴한 빵을 샀는데 생각보다 맛있게 먹고 있다. 속에 든 게 없는지 그릴에 누르면 저렴한 빵들은 종잇장처럼 납작해진다. 월계수 잎을 아직 구하지 못해서 아티초크는 아직 냉장고에 그대로 있다. 앞으로 구입할 낯선 채소들에 관한 내용을 정리할 기록장을 마련했다. 오랜만에 실물을 두고 가벼운 드로잉도 했다. 오늘도 집에서 나가지 않았고 점점 내 현실 감각은 둔마되어 가는 것 같다. 그래도 말해야 하면, 한다. 지금 해야 하지 않으니 하지 않는 것뿐이다.
레드 네일의 시기를 종결시키기로 했다.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작년 칠월 이후로 쭉 빨간 코팅을 트레이드마크처럼 손톱에 얹고 살았는데 이제 끝을 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 손톱을 좋아했던 건 피의 색이라서였다. 손톱을 뜯어내고 손가락 속을 열면 그 속에 있는 것의 빨강이니까. 겉이면서도 동시에 속인 것이 좋았다. 가짜의 형식을 빌려 진짜에 대한 힌트를 넌지시 전하는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손끝을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벽에 빨간 스크래치를 남기는 일이 너무 자주 생겨서 난감하기도 했다. 특히 종이에 긁으면 자국이 지워지지도 않아서 곤란했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치우고 비우고 버리고 싶은 요즘이다. 매니큐어를 다 버리고 쓰지 않는 화장품과 오래 신은 양말 따위의 자잘한 물건들을 한차례 버렸다. 이제 일요일에 오래된 머리만 쳐내면 완벽하다. 오랜만에 외출을 하는 기념으로 가벼운 화장을 했다. 가끔씩 사람처럼 하고 나가면 그래도 아직 살 만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테오에게 보낸 엽서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요즘 의욕이 없다며 곧 상담을 시작한다는 이야길 전했다. 왜 내가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매번 우울하고 사랑할 힘은커녕 살아갈 힘도 없는 사람들인가. 나는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는 중이었는데, 혹 그가 다시 인사를 해온다면 그 엽서는 작별인사였다고, 점점 말라가는 감정을 마르도록 그냥 내버려 둔 것은 너였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나오면 하려던 말도 싹 삼키게 된다. 왜들 이렇게 아픈 거야. 나도 슬픈 축에선 뒤지지 않는 사람인데 너네가 아픈 역할 선점해버리면 난 아플 수도 없잖아. 억울해진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십자말풀이를 진지하게 하는 중인 안경 쓴 남자 뒤에 앉았다. 어깨 너머로 훔쳐 보면서 즐겁게 귀가했는데 얼핏 보이는 첫 단어가 또띠야 칩, 그 아래로 이어지는 아프가니스탄. 빙긋 웃음이.
머리를 잘랐다. 역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보다 더 오래 그 일을 한 사람들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모든 것을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하는 편이지만 (그러다가 카메라를 완전히 망가뜨렸지.) 사실 이미 이 세상은 일을 나누어 가져가는 형태로 돌아가고 있다. 내가 삶에서 소비하는 서비스와 재화에 모르는 누군가의 노고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없다. 직업이라는 것, 직업의식이라는 것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이 년 전에 내 머리를 잘라 준 일본인 헤어드레서가 오늘도 있었다. 한국에선 괜히 말을 걸곤 하는데 말없이 묵묵히 잘라주고 서툰 영어로 문 앞까지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좋았다. 오래된 머리칼들이 다 잘려 나간 기분이 산뜻하다.
고민 끝에 방문한 포토 런던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소머셋 하우스에서 이루어진 페어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부지런히 움직이지 못한 탓에 네 시가 넘어 도착했고 두 시간 가량을 쉬지 않고 사진들을 보는 데 썼다. 돗때기 시장 느낌의 페어들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한 자리에서 여러 종류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와인 테이스팅처럼 짧은 호흡으로 여러 가지를 동시에 감각할 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 다녀온 오프프린트와 마찬가지로 각 갤러리들의 색깔을 파악하고 전체 그림을 조망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만으로 만족한다.